새 시대의 ‘일과 삶의 균형’에 대하여

언젠가부터 좋은 직업의 중요한 기준 중 하나로 ‘일과 삶의 균형(Work and Life Balance)’이 반드시 언급되고 있다. 이는 한국 사회의 과중한 업무 경향은 변하지 않으면서도, 경제 성장의 둔화로 일을 통해 기대되는 보상의 수준까지 정체되면서 발생한 자연스러운 현상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우리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이야기 되는 ‘일과 삶의 균형’이라는 관점에 동의하지 않는다. 한국 사회에서 ‘일과 삶의 균형’을 이야기 할 때, 그것은 보통 ‘일’과 ‘삶’을 철저히 분리하고, ‘일’을 ‘삶’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만 한정하기 때문이다. 정말 ‘일’은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이기에 우리 삶에서 최소화 되거나 적어도 철저히 구분 되어야 하는 개념인가?

중세와 근대 과학이 발전하던 시기, 위대한 성과를 거둔 과학자들 중 상당수는 평생 ‘일’을 할 필요가 없는 귀족인 경우가 많았다.

“근대 과학혁명 초기에만 해도 소수의 대학교수들을 빼면, 많은 과학자들은 생활에 여유가 있는 부자나 귀족 출신이었다. 만유인력 상수를 측정한 캐번디시(Henry Cavendish; 1731-1810), 근대 화학의 아버지 라부와지에(Antoine Laurent de Lavoisier; 1743-1794),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를 남긴 페르마(Pierre de Fermat; 1601-1665) 등이 모두 여기에 포함된다. – 프로보다 위대했던 아마추어들

만약 ‘일’을 생계 수단으로 한정한다면, 이 귀족 출신 과학자들이 평생을 걸쳐 이룩한 위대한 성과는 무엇이라 불러야 하는가? 평생 일할 필요가 없는 귀족들이 ‘자발적으로 일한 것’만 봐도 ‘일’이 인간에게 돈 이상의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쉽게 유추할 수 있다.

또 다른 상황을 생각해보자. 우리는 일반적으로 그림을 그리는 일, 음악을 만드는 일, 글을 쓰는 일 등을 업으로 하는 사람들을 예술가로 부른다. 어떤 예술가가 비 오는 날 차를 한잔 마시면서 바깥 풍경을 바라보며 상념에 잠겨 있다고 가정해 보자. 분명 이 순간의 감성들은 이 사람의 작품 세계에 어떤 형태로건 반영 될 것임에 틀림없다. 그럼 지금 이 예술가는 일을 하지 않는 상황 즉, 놀고 있는 상황인가 아니면 일을 하고 있는 상황인가? 예술가의 ‘일’을 캔버스에 직접 물감을 입히고 있는 상황, 오선지에 음표를 그리고 있는 상황, 종이에 글을 쓰고 있는 상황으로만 한정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우리는 각자의 일에 어떤 수준으로 건 창의성을 발휘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이런 ‘일과 일 아닌 상태 구분의 모호함’은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존재할 수 밖에 없다.

인간에게 일은 단순히 돈 버는 수단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삶과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스스로 좋아하는, 자아실현이 가능한 일을 하고 있다면 ‘내가 하는 일이 내 삶이고 내가 사는 삶이 내 일’이 된다. 진짜 ‘일과 삶의 균형’은 이런 관점에서 탄생한다. 열심히 일한만큼 충분한 휴식을 취해야 하는 것은 우리의 삶이 단거리 달리기가 아니기 때문이며, 소중한 사람들과의 시간이나 여행 같은 다양한 삶의 경험을 누려야 하는 것은 그것이 우리가 추구하는 일의 수준을 한층 더 높여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로켓펀치가 완전한 원격근무로 일하면서도 성과를 낼 수 있는 것은 구성원들이 일과 삶을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는 생각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로켓펀치는 사무실도 없고, 정기적인 오프라인 회의도 없고 그렇다고 언제부터 언제까지는 업무를 위해 온라인 상태여야 한다는 규칙도 없다. 이를 접한 많은 분들이 나에게 ‘구성원들이 일을 안하고 있는 건 아닌지 불안하지 않은가?’라고 물어보곤 한다. 하지는 나는 전혀 불안하지 않다. 본인 삶의 중요한 부분으로 일을 영위하는 사람들은, 그래서 일과 삶의 진짜 균형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위치나 시간으로 강제 받지 않아도 알아서 최선을 다하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일을 선택하라. 그러면 평생 하루도 일할 필요가 없다.”
– 로켓펀치 기업 문화를 정리한 문서 가장 첫 장에 있는 문장

우리가 만드는 로켓펀치가 각 개인이 자기 삶의 일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일을 찾아주는 것에, 그리고 새 시대의 일과 삶의 균형을 확립하는 데에 큰 역할을 하길 기대한다.

[아주 가끔 있는 로켓펀치 오프라인 회의 모습]

#원격근무 회사의 현실적인 오프라인 미팅 모습 (어수선…)

A post shared by Minhee Cho (@ingray) on

//platform.instagram.com/en_US/embeds.js

붙임 1. 이 글은 일과 삶의 진짜 균형에 대한 이야기다. 이 글이 아직까지 우리 사회에 남아있는 과한 업무와 박한 보상을 옹호하는 방향으로 읽히거나 사용되지 않기를 바란다.
붙임 2. 글을 쓰던 중에 나와 거의 비슷한 이야기를 하는 영문 에세이(Work/Life balance is bullshit.)를 찾았다.


이 글은 로켓펀치 블로그에도 함께 실린 글입니다. (‘새 시대의 일과 삶의 균형’에 대하여)

‘노땅’ 되지 않기

월요일 퇴근 길에 ‘난 알아요’ 듣다가 떠오른 생각 정리.

– 서태지와 아이들이 1992년에 데뷔했으니까 무려 20년 전 곡이다. 데뷔 무대 사회를 보신 분이 임백천 선생님이고, ‘트리오’ 같은 지금으로선 꽤 생소한 단어들이 들린다.

– 1992년을 기준으로 20년 전을 계산하면 1972년이고, 이때는 한참 나훈아와 남진 선생님의 팬덤(!)이 폭발하던 시기로 검색해보니 ‘머나먼 고향(나훈아)’, ‘님과 함께(남진)’가 이 해에 출시된 곡이다.

– 즉,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중고등학생들은, ‘난 알아요’를 들으며 추억에 잠길 수 있는 나에게서, 내가 두 노가수의 노래를 들으며 추억에 잠기는 분들께 느끼는 거리감만큼을 느낄지도 모른다. 그들에게 속칭 ‘노땅’ 혹은 ‘꼰대’로 충분히 불리 울 수 있는 세대가 된 것이다.
– 컴퓨터와 인터넷이 더 이상 중고등학생과 대학생만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것은 명확하지만, 우리와는 다른 패러다임 – 예를 들면 정보의 공개에 대한 거부감이 덜한 – 으로 더 많이 연결된 세상을 살아갈 미래의 어린 세대들과 어쩔 수 없는 거리가 생기는 것은, 파괴적인 서비스로 승부해야 하는 스타트업 업계 기획자의 한 사람으로서 두려운 것이 사실이다.
– 최근에 정독하고 있는 ‘프로젝트가 서쪽으로 간 까닭은 (부제: 프로젝트 군상의 86가지 행동 패턴)’이라는 책에서 ‘영계와 노땅’에 대한 비유가 나온다. 조직에 ‘영계’만 있어도 문제가 되지만 ‘노땅’이 많은 조직은 확실히 에너지가 떨어진다고 한다. 이 책에서는 그 해법으로 방과 후 고등학생을 아르바이트로 고용하라고 조언한다. 물론 절반은 농담이겠지만.
– 한참 회사 방향에 대한 고민이 많던 2011년 말부터 2012년 초까지, ‘우리가 컴퓨터를 처음 접했던 시절 (286 컴퓨터)에 비하면, 지금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편한 세상이고, 그런 상대적인 편안함에 길들여진 우리는 그다지 큰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니까, 새로운 아이디어 도출에도 어려움을 겪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 확실히 20대 중반 이후의 나는, ‘이 정도면 만족스럽다!’ 싶은 하드웨어나 소프트웨어를 한번 접하고 나면, 그 분야에 대한 새로운 것들을 잘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취향이 점점 보수적으로 바뀐 것 같다. 역설적이게도, 나에게는 보수적인 것이 위험한 것인데 말이다.
회사에 ‘변화의 문화’를 심고자, 작년 말부터 계획한 것이 있었는데 절반의 자금적인 이유, 절반은 다른 게 더 급하다는 핑계로 오늘까지 미루고 있었다. ‘노땅’이 되지 않기 위해 고등학생이라도 고용해보라는 위 책의 조언처럼 이번 주에는 꼭 실행해야 겠다. 🙂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한다” – 괴테 <파우스트 中>